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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양털을 찾으러 가는 ‘아르고(Argo) 호’는 항해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항해 도중에 배의 노가 부서졌다. 선원들은 어느 마을에 배를 정박시키고 나무를 구하기로 했다. 이것은 계획에 없던 조금의 휴식이었다. 남자는 다른 사람들 몰래 한숨을 뱉었다. 집을 떠나 긴 여정을 하게 된 것은 기쁘고 두근거렸지만 힘든 점도 많았다.
“힘드나?”
“아, 아니요.”
아버지가 죽고 저와 저의 어머니를 거둬 준 이 남자는 이 여정에 저를 넣은 장본인이었다. 무기 운반원으로 일하게 하고 무예를 가르쳐 준 남자. 그는 세간에 영웅이라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왜 저를 거두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추측이지만, 그는 저를 아낀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말에 짧은 대답으로 대응했으나 남자는 분명 제가 힘든 것이라 생각하는 지 크디 큰 손으로 툭툭 머리를 쓰다듬었다.
슬슬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남자는 덩치가 큰 영웅을 떠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쇠로 만든 물통을 들고 샘을 찾아 나섰다.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에 환한 달빛이 비쳤다.
구름 하나 없어 반짝이는 작은 별까지 보일 것 같은 맑은 하늘에 은은하게 밝은 달빛이 샘 깊은 곳까지 환하게 비치는 밤이다. 이런 날은 님프들이 매일 치르는 의식을 하기에 딱 알맞은 날이었다. 그것은 아르테미스 여신을 찬양하는 의식이었다. 매일 밤, 님프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금빛 머리를 가진 샘의 님프는 의식을 위해 느긋하게 수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위로 사람의 형체가 기웃거렸다. 금빛 머리의 님프는 마을 사람이 늦은 시간에 물을 뜨러 샘으로 온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환한 달빛을 빛 삼아 본 사람은 그 님프가 여태까지 봤던 사람들을 잊게 만들었다.
아직 앳된 소년의 얼굴이 남아있는 남자의 얼굴은 금빛 머리의 님프가 그동안 봐왔던 사람들 중에 심장이 멈출 정도로 잘 생긴 얼굴이었다. 님프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그 남자만을 아래서 쳐다보았다. 꿈인 것 같아 제 볼을 꼬집어보았지만, 꿈이 아니었다. 그 남자도 진짜다.
‘정말 잘 생겼다... 비교하는 건 나쁘지만, 여태까지 내가 봤던 사람들은 죄다 두꺼비랑 메기라면, 이 사람은 어린 개 같아.’
깊은 샘에는 목을 축이러 오는 짐승들이 많았다. 금빛 머리의 님프는 어느 날 보았던, 새끼티를 벗지 못한 들개를 떠올렸다. 성체만큼 길지 않은 주둥이와 꼬리, 한창 호기심이 많은 시기인지 이곳저곳의 냄새를 맡던 어린 개. 남자는 그것과 닮아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칼과 눈은 흔히 볼 수 있는 색이 아니었다. 길가나 들판이나 혹은 과일나무의 꽃처럼 흔한 색이 아니라 타오르는 불꽃같은 색이었다. 타오르는 불은 샘에 사는 님프와는 일평생 관계없을 터인데 그 금빛머리의 님프는 그것을, 남자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생각보다 빨랐다. 남자가 몸을 기울여 쇠로 만든 물통을 샘에 넣었을 때, 금빛 머리의 님프는 수면 위로 올라가 입을 맞추며 한 손으로는 남자의 목을 감싸고, 한 손으로는 남자의 손을 잡고 물속으로 이끌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남자는 반항조차 하지 못 하고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첨벙거리는 물소리를 잡아먹은 샘에는 쇠로 만든 물통이 물을 담지 못 하고 둥둥 떠 있었다.
식사를 준비하던 소년 —선원들은 가장 어린 남자를 그렇게 생각했다. — 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과 영웅은 밤늦게까지 소년을 찾아 나섰으나 고개를 저으며 돌아왔다. 그 중에 어느 누군가가 소년이 가져갔던 물통을 들고 왔었으나,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떠나는 날까지 소년을 찾지 못한 그들은 늦춰졌던 여정에 다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영웅과 선원들이 여정을 이어가던 중, 거친 파도를 잠재워 준 바다의 신이 영웅에게 말했다.
“네가 거뒀던 아이가 있지 않느냐. 어느 마을에 잠깐 들렀을 때, 물을 뜨러 갔던 아이 말이다.”
“예.”
“그리고 사라졌던 아이지.”
“....”
“그 아인 샘에 살던 님프가 데려갔단다. 첫 눈에 반했다고 하더구나.”
“데려갔단 말씀이라면...”
영웅은 얼굴을 찌푸리며 바다의 신을 보았다. 그는 영웅의 예상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샘의 님프와 결혼을 했다. 사라져 죽은 게 아니라 잘 살고 있으니, 돌아갈 때 기회가 된다면 다시 그곳으로 가 만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기억하고 있어라. 샘에 사는 금빛 머리의 님프다. 그 아이가 꼭 전해 달라고 했다.”
바다의 신은 그 말을 끝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는 어느 날 제가 와 부탁을 했던 금빛 머리의 님프가 절실하게 부탁하는 것을 떠올렸다. 평소에 조용하게 사는 아이가 이리 절실하니, 그는 그것을 들어주었고, 이는 곧 결혼의 허락이었다. 그리고 마음 한 편이 편치 않았는지 남자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실 수 없겠냐며 다시 절실하게 부탁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바다의 신은 더 이상 금빛 머리의 님프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아마, 샘의 아래와 위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